카롤루스 3세 심플렉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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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롤루스 3세 심플렉스는 서프랑크 왕국의 왕으로, 893년에 즉위했으나 여러 차례의 왕위 분쟁을 겪었다. 그는 바이킹의 침략에 대처하고 로타링기아 지역을 통치하려 노력했으나, 귀족들의 반발과 권력 다툼으로 인해 폐위되었다. 922년에는 반란으로 인해 왕위를 잃고 포로로 잡혔으며, 929년 감옥에서 굶어 죽었다. 그의 아들 루이 4세는 후에 서프랑크 왕국의 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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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롤루스 3세 심플렉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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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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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서프랑크 왕 |
통치 기간 | 898년 – 922년 |
왕조 | 카롤링거 왕조 |
선임자 | 외드 1세 |
후임자 | 로베르 1세 |
부왕 | 루이 2세 |
모후 | 파리의 아델라이드 |
로타링기아 왕 통치 기간 | 911년–923년 |
로타링기아 왕 선임자 | 루트비히 4세 |
배우자 | 프레데루나 (907년 결혼, 917년 사망) 에드기푸 오브 웨식스 (919년 결혼) |
자녀 | 지젤 드 프랑스 루이 4세 |
출생일 | 879년 9월 17일 |
사망일 | 929년 10월 7일 (50세) |
사망 장소 | 페론, 프랑스 |
매장지 | Collégiale Saint-Fursy de Péronne, 프랑스 |
이름 | |
프랑스어 | Charles III |
독일어 | Karl III |
별칭 | 단순왕 |
통치 | |
즉위 | 893년 |
대관일 | 893년 1월 28일, 랭스, 랭스 대성당, 생 레미 대성당 |
가족 | |
자녀 정보 링크 | #Family |
기타 정보 | |
별명 관련 | 그의 별명 "Simplex" 또는 "the Simple"은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음. 라틴어 "simplex"는 충성스럽거나 간계가 없는 "솔직한" 의미로 부여되었음. 그러나 그의 별명은 그 의미가 변질되었음에도 여전히 그에게 붙어다님. 연대기 작가들은 그를 일반적으로 칭찬하지 않았음. 그는 919년 자신의 부하들을 버린 사건으로 인해 후대의 연대기 작가에 의해 '샤를 멍청이'라고 불렸음. 게다가 그는 stultus (얼간이), hebes (멍청이), insipiens (어리석은), parvus (작은) 그리고 minor (열등한)라고 불렸음. |
2. 생애
879년 8월, 루이 3세와 샤를로망은 샤를 3세의 어머니인 아델라이드를 간음죄로 고소했고, 랭스의 대주교 힝크마르는 이 고소장을 근거로 프리울리의 아델라이드를 재판하였다. 그러나 프리울리의 아델라이드는 형문을 이겨냈고 결국 무죄를 선고받아, 샤를 3세는 루이 2세의 합법적인 아들로 인정받게 된다.
884년 형 샤를로망 3세가 죽었을 때 샤를 3세는 5세의 유아였으므로 서프랑크의 귀족들은 동프랑크 왕국의 샤를 3세 르 그로(카를 3세 비만왕)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쾰른의 대주교 위그는 네우스트리아 백작인 로베르 4세의 외손자로, 외드와 로베르 1세의 외조카였지만, 그는 단순왕 샤를의 후견인이 되었다. 쾰른의 대주교 위그는 서프랑크 왕국의 귀족들이 추대하는 인물 대신, 어린 샤를의 시간을 벌게 하기 위해서 일부러 샤를의 당숙이자 동프랑크와 이탈리아의 국왕이기도 했던 샤를 3세 르 그로를 찬성했다.[34]
887년 11월 샤를 르 그로가 아르눌프의 쿠데타에 의해 축출된 뒤에, 서프랑크 왕국의 귀족들은 바이킹을 퇴치한 데 공을 세운 로베르 가문의 외드를 국왕으로 추대했다. 885년~886년 파리시에 침투한 바이킹을 물리쳤던 외드는 경건왕 루이의 외손으로 아득하게나마 왕위 계승권을 갖고 있었다. 한편 888년 초, 새로 서로마 황제가 된 귀도는 샤를을 지지하였다.
889년 6월 아키텐 공작이자 푸아티에 백작인 라눌프 2세를 찾아가 외드에 대한 충성을 버리고 자신에게 협조할 것을 요청하여 포섭하였다.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인 귀도 3세는 아키텐 공작이자 아키텐의 왕 라눌프 2세에게 샤를 르 생쁠의 보호를 부탁했다. 샤를은 공작이자 자립한 아키텐의 왕 라눌프 2세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 라눌프 2세는 샤를에게 오를레앙의 10개 도시를 주었다.
892년 9월 아키텐의 라눌프의 일족이 베르비네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외드는 이들을 진압하러 갔다. 893년 1월 28일 샤를은 랭스의 대주교 풀크와 다른 귀족들의 추대로 랭스 대성당에서 세례를 받은 뒤 서프랑크의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이들은 샤를을 서프랑크 왕국이 진정한 왕으로 내세워 왕위 수여식을 거행했다. 랭스 대주교 풀크는 즉위식 때, 샤를의 고조부 카롤루스 대제의 즉위식을 연상하도록 랭스 대성당에서 공개적으로 대관식을 주관하는 이벤트를 기획하였다. 그러나 헤르베르티언 가문과 플랑드르, 부르고뉴 등은 외드를 지지했다. 한편 친척이기도 했던 아르눌프는 사자를 보내 샤를 르 생쁠에게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봉신이 될 것을 요구했으나, 샤를은 이를 거절했다. 한편 샤를 3세의 지지파와 외드 지지파 간에 내전이 발생했다. 샤를의 지지자들은 에페르네와 랭스 지역을 포위했고, 외드의 지지자들이 나타나 서로 포위하고 주고받았다. 최종적으로893년 9월 샤를의 지지자들이 포위를 해제하고 물러났다. 전쟁은 894년 3월 31일에 잠정 휴전하였다.
아르눌프는 미성년자가 영토를 제대로 다스릴수 있느냐며 소년이 나라를 통치하는 것이 가능한가 여부를 묻고는, 샤를과 외드를 보름스로 소환했지만 샤를은 가기를 거부했다. 895년 샤를과 외드를 보름스로 소환했지만 샤를은 가기를 거부했다. 화가 난 아르눌프는 외드를 서프랑크의 왕으로 승인하였다. 이어 아르눌프의 이탈리아 원정 지원 요청 역시 거부하고 응하지 않았다.
895년 5월 외드는 보름스로 와 자신의 서프랑크 왕국의 왕위를 주장했다. 그러나 단순왕 샤를은 자신의 고문의 의견을 받아들여 아르눌프의 출석 요구를 거부하고, 보름스로 오지 않았다. 샤를이 자신의 명령을 거역한데 크게 화가 난 아르눌프는 외드를 지지하였으며, 서자 츠벤티볼트에게 로트링겐의 왕위를 넘기고 직접 통치하게 했다. 아르눌프는 츠벤티볼트에게 서프랑크 왕국을 감시하게 했다. 896년 다시 외드와의 전쟁이 벌어졌지만 이렇다할 소득 없이 아르눌프의 지시로 휴전하였다.
884년 12월 6일, 서프랑크 왕국의 카를로만 2세가 남자 후계자 없이 사망했고, 그의 이복형제이자 훗날의 카를 3세 심플렉스는 겨우 다섯 살이었다.[4] 이 때문에, 이미 신성 로마 황제이자 동프랑크 왕국의 왕이었던 사촌 카를 3세 비만왕이 왕국의 귀족들의 요청으로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17]
북쪽 침략자들의 위협이 커지자, 지역 귀족들은 다시 어린 카를 3세 심플렉스의 왕위 계승을 거부하고, 바이킹에 맞서 파리를 성공적으로 방어한 파리의 오도 (로베르 가 출신)를 새로운 서프랑크 왕으로 선택했다. 893년, 랭스의 풀크 대주교의 도움을 받아, 카를 3세 심플렉스는 왕위를 되찾으려 했지만 실패했다.
898년 1월 오도가 죽은 후, 카를 3세 심플렉스는 마침내 서프랑크 왕국의 왕위를 차지했다.
2. 1. 초기 생애
샤를 3세는 이복 형인 루이 3세와 샤를로망에게 적대적이었다. 할아버지 대머리 카를은 며느리인 프리울리의 아델라이드의 신분이 낮다는 이유로 강제로 이혼시킨 뒤, 아델라이드와 다시 결혼하게 했다. 879년 8월, 루이 3세와 샤를로망은 아델라이드를 간음죄로 고소했고, 랭스의 대주교 힝크마르는 이 고소장을 근거로 아델라이드를 재판하였다. 그러나 아델라이드는 형문을 이겨내고 무죄를 선고받아, 샤를 3세는 루이 2세의 적법한 아들로 인정받았다.[3]884년 형 샤를로망이 죽었을 때 샤를 3세는 5세였으므로, 서프랑크 귀족들은 카를 3세 비만왕을 왕으로 추대하였다.[4] 쾰른의 대주교 위그는 외드와 로베르 1세의 외삼촌이었지만, 샤를의 후견인이 되었다. 위그는 어린 샤를의 시간을 벌기 위해 샤를의 당숙이자 동프랑크 왕국과 이탈리아의 왕이었던 카를 3세 비만왕을 지지했다.[34]
887년 11월 카를 3세 비만왕이 아르눌프의 쿠데타로 축출된 뒤, 서프랑크 귀족들은 바이킹을 물리친 외드를 국왕으로 추대했다.[5] 885년~886년 파리에 침투한 바이킹을 물리쳤던 외드는 경건왕 루이의 외손으로 미약하게나마 왕위 계승권이 있었다. 888년 초, 이탈리아의 왕이 된 귀도는 샤를을 지지하였다.
889년 6월 아키텐 공작 라눌프 2세를 찾아가 외드에 대한 충성을 버리고 자신에게 협조할 것을 요청하여 포섭하였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귀도 3세는 라눌프 2세에게 샤를의 보호를 부탁했다. 라눌프 2세는 샤를에게 오를레앙의 10개 도시를 주었다.
892년 9월 라눌프의 일족이 베르비네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외드는 이들을 진압하러 갔다. 893년 1월 28일 샤를은 랭스 대주교 풀크와 다른 귀족들의 추대로 랭스 대성당에서 세례를 받고 서프랑크의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이들은 샤를을 서프랑크의 진정한 왕으로 내세워 왕위 수여식을 거행했다. 랭스 대주교 풀크는 카롤루스 대제의 즉위식을 연상하도록 랭스 대성당에서 공개 대관식을 주관하였다. 그러나 헤르베르티언 가문과 플랑드르, 부르고뉴 등은 외드를 지지했다. 아르눌프는 샤를에게 충성 맹세를 요구했으나, 샤를은 거절했다. 샤를 3세 지지파와 외드 지지파 간에 내전이 발생했다. 샤를의 지지자들은 에페르네와 랭스 지역을 포위했고, 외드의 지지자들이 나타나 서로 포위하고 주고받았다. 893년 9월 샤를의 지지자들은 포위를 풀고 물러났다. 전쟁은 894년 3월 31일에 잠정 휴전하였다.
아르눌프는 미성년자가 영토를 제대로 다스릴 수 있는지 묻고는, 샤를과 외드를 보름스로 소환했지만 샤를은 거부했다. 895년 샤를과 외드를 보름스로 소환했지만 샤를은 거부했다. 화가 난 아르눌프는 외드를 서프랑크의 왕으로 승인하였다. 아르눌프의 이탈리아 원정 지원 요청 역시 거부하고 응하지 않았다.
895년 5월 외드는 보름스로 가 자신의 서프랑크 왕위를 주장했다. 그러나 샤를은 고문의 의견을 받아들여 아르눌프의 출석 요구를 거부하고 보름스로 오지 않았다. 샤를이 명령을 거역한 데 크게 화가 난 아르눌프는 외드를 지지하였으며, 서자 츠벤티볼트에게 로타링기아 왕위를 넘기고 직접 통치하게 했다. 아르눌프는 츠벤티볼트에게 서프랑크 왕국을 감시하게 했다. 896년 다시 외드와의 전쟁이 벌어졌지만 아르눌프의 지시로 휴전하였다.
884년 12월 6일, 서프랑크 왕 카를로만 2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했고, 카를 3세 심플렉스는 겨우 다섯 살이었다.[4] 신성 로마 황제이자 동프랑크 왕국의 왕이었던 사촌 카를 3세 비만왕이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17]
북쪽 침략자들의 위협이 커지자, 지역 귀족들은 어린 카를 3세 심플렉스의 왕위 계승을 거부하고, 파리를 방어한 외드 (로베르 가 출신)를 새 서프랑크 왕으로 선택했다. 893년, 랭스의 풀크 대주교의 도움을 받아, 카를 3세 심플렉스는 왕위를 되찾으려 했지만 실패했다.
898년 1월 오도가 죽은 후, 카를 3세 심플렉스는 서프랑크 왕위를 차지했다.
2. 1. 1. 왕위 계승 분쟁
샤를 3세의 이복 형이었던 루이 2세와 샤를로망은 샤를 3세에게 적대적이었다. 할아버지 대머리 카를이 자신의 며느리가 신분이 한미한 것을 이유로 강제로 이혼시킨 뒤, 나중에 샤를 3세의 어머니인 프리울리의 아델라이드와 결혼하였다. 879년 8월, 루이 3세와 샤를로망은 샤를 3세의 어머니인 아델라이드를 간음죄로 고소했고, 랭스의 대주교 힝크마르는 이 고소장을 근거로 프리울리의 아델라이드를 재판하였다. 그러나 프리울리의 아델라이드는 형문을 이겨냈고 결국 무죄를 선고받아, 샤를 3세는 루이 2세의 합법적인 아들로 인정받게 된다.884년 형 샤를로망 3세가 죽었을 때 샤를 3세는 5세의 유아였으므로 서프랑크의 귀족들은 동프랑크 왕국의 샤를 3세 르 그로(카를 3세 비만왕)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쾰른의 대주교 위그는 네우스트리아 백작인 로베르 4세의 외손자로, 외드와 로베르 1세의 외조카였지만, 그는 단순왕 샤를의 후견인이 되었다. 쾰른의 대주교 위그는 서프랑크 왕국의 귀족들이 추대하는 인물 대신, 어린 샤를의 시간을 벌게 하기 위해서 일부러 샤를의 당숙이자 동프랑크와 이탈리아의 국왕이기도 했던 샤를 3세 르 그로를 찬성했다.[34]
887년 11월 샤를 르 그로가 아르눌프의 쿠데타에 의해 축출된 뒤에, 서프랑크 왕국의 귀족들은 바이킹을 퇴치한 데 공을 세운 로베르 가문의 외드를 국왕으로 추대했다. 885년~886년 파리시에 침투한 바이킹을 물리쳤던 외드는 경건왕 루이의 외손으로 아득하게나마 왕위 계승권을 갖고 있었다. 한편 888년 초, 새로 서로마 황제가 된 귀도는 샤를을 지지하였다.
889년 6월 아키텐 공작이자 푸아티에 백작인 라눌프 2세를 찾아가 외드에 대한 충성을 버리고 자신에게 협조할 것을 요청하여 포섭하였다.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인 귀도 3세는 아키텐 공작이자 아키텐의 왕 라눌프 2세에게 샤를 르 생쁠의 보호를 부탁했다. 샤를은 공작이자 자립한 아키텐의 왕 라눌프 2세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 라눌프 2세는 샤를에게 오를레앙의 10개 도시를 주었다.
892년 9월 아키텐의 라눌프의 일족이 베르비네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외드는 이들을 진압하러 갔다. 893년 1월 28일 샤를은 랭스의 대주교 풀크와 다른 귀족들의 추대로 랭스 대성당에서 세례를 받은 뒤 서프랑크의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이들은 샤를을 서프랑크 왕국이 진정한 왕으로 내세워 왕위 수여식을 거행했다. 랭스 대주교 풀크는 즉위식 때, 샤를의 고조부 카롤루스 대제의 즉위식을 연상하도록 랭스 대성당에서 공개적으로 대관식을 주관하는 이벤트를 기획하였다. 그러나 헤르베르티언 가문과 플랑드르, 부르고뉴 등은 외드를 지지했다. 한편 친척이기도 했던 아르눌프는 사자를 보내 샤를 르 생쁠에게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봉신이 될 것을 요구했으나, 샤를은 이를 거절했다. 한편 샤를 3세의 지지파와 외드 지지파 간에 내전이 발생했다. 샤를의 지지자들은 에페르네와 랭스 지역을 포위했고, 외드의 지지자들이 나타나 서로 포위하고 주고받았다. 최종적으로893년 9월 샤를의 지지자들이 포위를 해제하고 물러났다. 전쟁은 894년 3월 31일에 잠정 휴전하였다.
아르눌프는 미성년자가 영토를 제대로 다스릴수 있느냐며 소년이 나라를 통치하는 것이 가능한가 여부를 묻고는, 샤를과 외드를 보름스로 소환했지만 샤를은 가기를 거부했다. 895년 샤를과 외드를 보름스로 소환했지만 샤를은 가기를 거부했다. 화가 난 아르눌프는 외드를 서프랑크의 왕으로 승인하였다. 이어 아르눌프의 이탈리아 원정 지원 요청 역시 거부하고 응하지 않았다.
895년 5월 외드는 보름스로 와 자신의 서프랑크 왕국의 왕위를 주장했다. 그러나 단순왕 샤를은 자신의 고문의 의견을 받아들여 아르눌프의 출석 요구를 거부하고, 보름스로 오지 않았다. 샤를이 자신의 명령을 거역한데 크게 화가 난 아르눌프는 외드를 지지하였으며, 서자 츠벤티볼트에게 로트링겐의 왕위를 넘기고 직접 통치하게 했다. 아르눌프는 츠벤티볼트에게 서프랑크 왕국을 감시하게 했다. 896년 다시 외드와의 전쟁이 벌어졌지만 이렇다할 소득 없이 아르눌프의 지시로 휴전하였다.
884년 12월 6일, 서프랑크 왕국의 카를로만 2세가 남자 후계자 없이 사망했고, 그의 이복형제이자 훗날의 카를 3세 심플렉스는 겨우 다섯 살이었다.[4] 이 때문에, 이미 신성 로마 황제이자 동프랑크 왕국의 왕이었던 사촌 카를 3세 비만왕이 왕국의 귀족들의 요청으로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17]
북쪽 침략자들의 위협이 커지자, 지역 귀족들은 다시 어린 카를 3세 심플렉스의 왕위 계승을 거부하고, 바이킹에 맞서 파리를 성공적으로 방어한 파리의 오도 (로베르 가 출신)를 새로운 서프랑크 왕으로 선택했다. 893년, 랭스의 풀크 대주교의 도움을 받아, 카를 3세 심플렉스는 왕위를 되찾으려 했지만 실패했다.
898년 1월 오도가 죽은 후, 카를 3세 심플렉스는 마침내 서프랑크 왕국의 왕위를 차지했다.
2. 2. 서프랑크 왕 즉위 (898년)
911년 바이킹 그룹이 서프랑크 왕국을 침략하여 루앙을 차지했다. 롤로가 이끄는 바이킹 족은 바로 파리와 샤르트르를 점령했다. 샤를은 친히 군사를 이끌고 전투를 벌였지만 대부분 패배했고, 8월 26일 샤르트르 근처에서 엄청난 손실을 입고 겨우 승리하였다.[7] 샤를은 롤로와 협상하기로 결정했고, 911년말 생클레르쉬레프트 조약을 체결하여 저 사이네 지역(나중에 노르망디라 불리게 된 지역)을 노르만족 롤로에게 봉토로 지급하고, 로마 가톨릭으로 세례를 받고 봉신이 된다는 조건으로 바이킹의 프랑스 침공의 종지부를 찍었다. 또한 롤로는 세례를 받고 샤를의 딸인 서프랑크의 기셀라와 결혼하기로 동의했다.[7] 이 조약으로 노르망디 공국이 세워졌다. 바이킹의 충성에 대한 대가로 그들은 에프트 강과 바다 사이의 모든 땅과, 당시 서프랑크가 정복하려다 실패한 독립 국가였던 브르타뉴 공국을 하사받았다.
생클레르쉬르레프트 조약으로 롤로와 바이킹 족에게 노략질을 일삼지 않는다는 다짐을 받아내고 노르망디에 정착시켰다. 그러나 바이킹 족과 꾸준이 싸워온 로베르 가문 사람들과 베르망두아 백작가문은 조약 체결에 강하게 반발했다.
2. 2. 1. 노르만족과의 관계
911년의 바이킹 그룹이 서프랑크 왕국을 침략하여 루앙을 차지했다. 롤로가 이끄는 바이킹 족은 바로 파리와 샤르트르를 점령했다. 샤를은 친히 군사를 이끌고 전투를 벌였지만 대부분 패배했고, 8월 26일 샤르트르 근처에서 엄청난 손실을 입고 겨우 승리하였다.[7] 샤를은 롤로와 협상하기로 결정했고, 911년말 생클레르쉬레프트 조약을 체결하여 저 사이네 지역(나중에 노르망디라 불리게 된 지역)을 노르만족 롤로에게 봉토로 지급하고, 로마 가톨릭으로 세례를 받고 봉신이 된다는 조건으로 바이킹의 프랑스 침공의 종지부를 찍었다. 또한 롤로는 세례를 받고 샤를의 딸인 서프랑크의 기셀라와 결혼하기로 동의했다.[7] 이 조약으로 노르망디 공국이 세워졌다. 바이킹의 충성에 대한 대가로 그들은 에프트 강과 바다 사이의 모든 땅과, 당시 서프랑크가 정복하려다 실패한 독립 국가였던 브르타뉴 공국을 하사받았다.생클레르쉬르레프트 조약으로 롤로와 바이킹 족에게 노략질을 일삼지 않는다는 다짐을 받아내고 노르망디에 정착시켰다. 그러나 바이킹 족과 꾸준이 싸워온 로베르 가문 사람들과 베르망두아 백작가문은 조약 체결에 강하게 반발했다.
2. 3. 로타링기아 왕 즉위 (911년)
911년 9월 24일 동프랑크의 유아왕 루트비히가 18세로 죽자, 11월 21일 샤를은 자신이 루트비히의 친척임을 내세워 동프랑크와 로트링겐의 왕위 계승권을 요구하였다. 로트링겐의 귀족들은 샤를을 지지했고 그는 로트링겐의 왕으로 즉위하였다. 한편 동프랑크의 귀족들은 아르눌프의 외손자였던 프랑켄 공작 콘라두스 1세를 추대했다. 유아왕 루트비히에게는 자식이 없었고, 츠벤티볼트에게는 어린 딸들만이 있었다. 그러자 샤를 르 생쁠은 자신이 유아왕 루트비히의 가까운 친척이자, 정당한 상속자임을 주장하며 동프랑크를 침공했다. 로트링겐의 귀족들은 콘라두스 1세를 받드느냐 여부를 놓고 논쟁이 발생했고, 로트링겐의 하인아우트 백작 레니에 1세는 콘라두스 1세에 대한 충성을 거부하고, 샤를 3세의 지지를 선언, 샤를을 왕으로 받들었다.그는 로트링겐에 각별히 신경을 썼지만 직접 다스릴 수는 없었으므로, 프레데루나의 부모인 이멘티가르와 라그네힐드, 로트링겐의 귀족으로 카를 2세 대머리왕의 사위인 하인아우트의 레니에 1세을 로트링겐 공작으로 임명해 사실상 로트링겐의 통치를 일임하였다. 레니에 1세는 마스(Maasgau) 백작 기셀베르트와 황제 로타르 1세의 딸 이멘가르드의 아들이었고, 레니에 1세의 부인 에시나다(Hersinda)는 샤를 르 생쁠의 할아버지 카를 2세 대머리왕의 서녀였다. 그럼에도 샤를은 로트링겐의 정치에 직접 개입하여 각별히 신경을 썼다. 레니에 1세는 로트링겐의 귀족들과 폭동을 일으켜 츠벤티볼트를 몰아냈기에, 샤를 3세는 레니에 1세를 불신하였다. 레니에 1세는 자신이 사망하는 916년까지 로트링겐의 공작이자 섭정으로 대신 로렌을 통치하였다.
909년 샤를은 자신의 누이인 서프랑크의 이르멘가르트와 이브레아의 베르너(Werner)의 딸 쿠니군데를 로트링겐의 귀족, 로트링겐의 비게리히(Wigeric of Lotharingia)와 결혼시켰다.
911년, 동프랑크 왕국의 마지막 카롤링거 왕인 어린 루이가 사망했고, 그에게 충성을 다했던 로타링기아의 귀족들은 로렌 공작 레기나르의 지휘 아래 샤를을 새로운 왕으로 선언하며, 비카롤링거인 콘라트 1세를 새로운 왕으로 선출한 동프랑크 왕국으로부터 독립했다.[6] 샤를은 수년 동안 로타링기아의 지지를 얻기 위해 노력했는데, 예를 들어 907년 4월 로타링기아 출신의 프레데루나와 결혼했고,[8] 909년에는 그의 조카인 프랑스의 쿤디군데가 로타링기아의 비게리크와 결혼했다. 샤를은 콘라트 1세의 두 차례 공격으로부터 로타링기아를 방어했다.[9] 925년, 로타링기아는 다시 동프랑크 왕국에 의해 점령되었다.[10]
2. 3. 1. 로타링기아 통치와 귀족들의 반발
911년 9월 24일 동프랑크의 유아왕 루트비히가 18세로 죽자, 11월 21일 샤를은 자신이 루트비히의 친척임을 내세워 동프랑크와 로트링겐의 왕위 계승권을 요구하였다. 로트링겐의 귀족들은 샤를을 지지했고 그는 로트링겐의 왕으로 즉위하였다. 한편 동프랑크의 귀족들은 아르눌프의 외손자였던 프랑켄 공작 콘라두스 1세를 추대했다. 유아왕 루트비히에게는 자식이 없었고, 츠벤티볼트에게는 어린 딸들만이 있었다. 그러자 샤를 르 생쁠은 자신이 유아왕 루트비히의 가까운 친척이자, 정당한 상속자임을 주장하며 동프랑크를 침공했다. 로트링겐의 귀족들은 콘라두스 1세를 받드느냐 여부를 놓고 논쟁이 발생했고, 로트링겐의 하인아우트 백작 레니에 1세는 콘라두스 1세에 대한 충성을 거부하고, 샤를 3세의 지지를 선언, 샤를을 왕으로 받들었다.그는 로트링겐에 각별히 신경을 썼지만 직접 다스릴 수는 없었으므로, 프레데루나의 부모인 이멘티가르와 라그네힐드, 로트링겐의 귀족으로 카를 2세 대머리왕의 사위인 하인아우트의 레니에 1세을 로트링겐 공작으로 임명해 사실상 로트링겐의 통치를 일임하였다. 레니에 1세는 마스(Maasgau) 백작 기셀베르트와 황제 로타르 1세의 딸 이멘가르드의 아들이었고, 레니에 1세의 부인 에시나다(Hersinda)는 샤를 르 생쁠의 할아버지 카를 2세 대머리왕의 서녀였다. 그럼에도 샤를은 로트링겐의 정치에 직접 개입하여 각별히 신경을 썼다. 레니에 1세는 로트링겐의 귀족들과 폭동을 일으켜 츠벤티볼트를 몰아냈기에, 샤를 3세는 레니에 1세를 불신하였다. 레니에 1세는 자신이 사망하는 916년까지 로트링겐의 공작이자 섭정으로 대신 로렌을 통치하였다.
909년 샤를은 자신의 누이인 서프랑크의 이르멘가르트와 이브레아의 베르너(Werner)의 딸 쿠니군데를 로트링겐의 귀족, 로트링겐의 비게리히(Wigeric of Lotharingia)와 결혼시켰다.
911년, 동프랑크 왕국의 마지막 카롤링거 왕인 어린 루이가 사망했고, 그에게 충성을 다했던 로타링기아의 귀족들은 로렌 공작 레기나르의 지휘 아래 샤를을 새로운 왕으로 선언하며, 비카롤링거인 콘라트 1세를 새로운 왕으로 선출한 동프랑크 왕국으로부터 독립했다.[6] 샤를은 수년 동안 로타링기아의 지지를 얻기 위해 노력했는데, 예를 들어 907년 4월 로타링기아 출신의 프레데루나와 결혼했고,[8] 909년에는 그의 조카인 프랑스의 쿤디군데가 로타링기아의 비게리크와 결혼했다. 샤를은 콘라트 1세의 두 차례 공격으로부터 로타링기아를 방어했다.[9] 925년, 로타링기아는 다시 동프랑크 왕국에 의해 점령되었다.[10]
2. 4. 폐위와 유폐 (922년 ~ 929년)
922년 샤를 3세는 자신의 배다른 고모인 로틸드의 세실수도원장 직을 박탈했다. 카를과 오툉의 리첼다의 딸이었던 로틸드는 895년 로저 드 마이네와 결혼했다가 과부가 되었다. 샤를은 로틸드에게서 빼앗은 세실수도원을 로트링겐 출신 총신 하가논에게 제공한다.922년 로렌에 침입한 독일의 왕 하인리히 1세를 상대하여 겨우 이기고 화약을 체결한 뒤 돌아왔다. 그는 로타링기아의 군사와 병력에 주로 의존하였다. 샤를이 로트링겐의 업무와 고문관들에게만 신경을 쓰고 네우스트리아의 귀족들을 소외시키자 920년 서프랑크의 귀족들은 샤를의 퇴위를 요구하기도 했다. 922년 네우스트리아 귀족들은 파리에서 반란을 일으켜, 외드의 형제인 로베르 1세를 왕으로 뽑았다. 샤를은 로트링겐으로 피신하였다.

922년 6월 29일 귀족들은 로베르 1세를 왕으로 선출하고 6월 30일 랭스 대성당에서 임금으로 즉위했다. 로베르 1세는 군사를 이끌고 로트링겐과 전쟁, 아들 위그 르 그랑을 쉐브르몽(Chèvremont) 성으로 보냈다. 샤를은 기셀베르트 등과 함께 로베르 군을 대적했다.
922년 6월 30일부터 7월 2일 샤를 르 생쁠은 바이킹 군대의 지원하에 서프랑크로 되돌아왔다. 923년 샤를은 군사를 일으켜 뫼즈, 아팅기에, 수아송에서 로베르 1세의 군대와 싸웠으나, 6월 15일 수아송 전투 (923년)에서 패배하였다. 그러나 같은 날, 수아송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자객을 보내 로베르 1세를 죽였지만, 플랑드르로 군사를 이끌고 갔다. 그해 7월 플랑드르성에 미리 숨어있던 로베르 1세의 처남이자 사위인 베르망두아 백작 헤르베르트 2세가 파놓은 함정에 걸려 포로가 되었다. 그리고 곧 부르고뉴의 라울이 새로 왕이 되었다. 그의 아내 에드지푸는 아들 루이 4세를 데리고 잉글랜드로 건너갔다.
베르망두아 백작가문은 샤를마뉴의 차남 피피노 카를로만의 손자 상리스의 피핀 2세의 후손으로, 경건왕 루이 드 데보네르의 후손인 샤를 3세에게는 같은 가문의 먼 친척이 되었지만[35], 818년 베른하르트가 경건왕 루이 드 데보네르에 의해 두눈이 뽑히고 장님이 되어 병을 얻어 죽은 일 이후, 경건왕 루이 드 데보네르의 후손들에게 대대로 앙심을 품고 있었다. 베르망두아 백작 헤르베르트 2세는 자신이 사로잡은 샤를을 이용해, 새로 왕이 된 라울에게서 이권을 얻었다.
헤르베르트 2세는 협상을 하자고 한 뒤 그를 테오도리히 성(castellum Theodorici, 샤토-티에리)안에 감금했다. 샤를은 노르만 족에게 자신을 지원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노르만 족은 소수가 그를 지원하였다. 923년 7월 13일 샤를의 폐위가 선언되고, 라울은 서프랑크의 국왕으로 선출되었다. 샤를은 4년간 테오도리히 성에 감금되었다가 화재 후 솜주의 페로네로 옮겨졌다.
헤르베르트 2세는 포로로 잡은 샤를을 이용해, 새로 왕이 된 라울에게서 이권을 얻었다. 헤르베르트 2세는 샤를을 이용해 라울에게 거래를 요구, 자신의 독립적인 공국을 세우려 했다. 한때 샤를은 트루아로 옮겨져 라울과 면담하기도 했다. 헤르베르트 2세는 샤를을 이용해서 자신의 아들 위그를 랭스 대주교 자리에 앉히려 했지만 성직자들의 반대로 실패했고, 라울은 위그의 대주교직을 포기하라고 권고한다.
샤를은 곧 헤르베르트 2세에 의해 솜의 페로네 성의 감옥에 유폐되었다.[36] 927년 말, 헤르베르트 2세와 라울이 페론에 도착했을 때 샤를은 죄수복 차림으로 결박되었다. 라울은 그에게 칼을 가져다가 바치며 그를 일단 정당한 왕으로 인정하였다. 라울은 그를 합법적인 왕으로 예우하는 한편, 포로로서 예우하였다.
2. 4. 1. 죽음
헤르베르트 2세는 포로로 잡은 샤를을 이용해, 새로 왕이 된 라울에게서 이권을 얻었다. 헤르베르트 2세는 샤를을 이용해 라울에게 거래를 요구, 자신의 독립적인 공국을 세우려 했다.[36] 샤를은 927년 솜므의 다른 감옥으로 옮겨졌다가 929년 10월 페로네(Peronne) 감옥에서 굶어 죽었다. 굴욕적인 카롤루스 3세 심플렉스는 924년 페론으로 이송되었고, 그곳에서 929년 10월 7일에 사망하여 즉시 생 퓌르시 수도원에 묻혔다.3. 유산
카롤루스 3세는 솜주 페로네의 생 푸르시 교회(Saint-Fursy abbey) 묘지 중앙부에 안장되었다. 비문은 "Hic jacet Carolus Pius Francorum Rex, cuius animàm absoluat omnipotens et misericors Deus. Amen"라고 새겨졌다. 929년 10월 7일 그의 기념비와 석관은 높은 제단 뒤로 이동되었다. 프랑스 대혁명 기간 중 그의 무덤은 파괴되었다. 샤를은 페로네의 감옥에서 굶어죽은 것으로 보나 일설에는 헤르베르트 2세에 의해 독살당했다는 설이 돌기도 했다. 그의 아들 루이는 922년 그가 폐위되기 전 모후 에드지푸와 함께 영국으로 피신했다가 936년 귀족들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다.
4. 가족 관계
카롤루스 3세는 루이 2세와 프리울리의 아델라이드의 아들이며, 대머리 카를의 손자이다.[3] 루이 3세와 샤를로망 3세는 그의 이복 형이다.[3]
907년 5월 프레데루나(Frederuna, 887~917.2.10)와 처음 결혼했으며, 디트리히 테오도리히 폰 링겔하임의 딸이었다.[3] 프레데루나와의 사이에서는 여섯 명의 딸을 두었다.[3]
- 이르멘트루드(Ermentrude): 로트링겐의 팔라틴 백작 고드프리(Godefroy, 949년 사망)와 결혼[3]
- 프레데루나(Frederuna)[3]
- 아델하이트(Adelheid): 구이(Gouy)의 백작 라울과 결혼[3]
- 기젤라(Gisla): 노르만 부족장 롤로와 결혼[24]
- 로트루드(Rotrud)[3]
- 힐데가르트(Hildegard)[3]
919년에 에드지푸(Eadgifu, ?~951)와 두 번째로 결혼했다.[3] 에드지푸와의 사이에서 아들 루이 4세(920~954)를 얻었으며, 루이 4세는 936년부터 954년까지 서프랑크 왕위에 올랐다.[3]
이 외에도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첩에게서 여러 명의 서자녀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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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프랑스 역사에는 두 명의 샤를 3세가 존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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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마뉴 대제-경건왕 루트비히 1세-대머리 카를 2세 르 쇼브-말더듬이왕 루이 2세-샤를 3세 생쁠
샤를마뉴 대제-피피노 카를로만-베른하르트(서자)-상리스 백작 피핀 2세(서자)-헤르베르트 1세-헤르베르트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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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st Francia: The Kingdom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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